[서평] 조선의 첫 세계일주 <해천추범, 1896년 민영환의 세계일주>

조선시대 한 세계일주에 관한 책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책을 추천해 준 사람은 저녁식사 하던 직장 후배였다. 매우 솔깃한 얘기여서 모임을 마치자마자 검색을 해 보았는데, 품절.. 으앙.. 심지어 e북도 없다! 컥
이래 저래 알아보다 중고책방에서 정가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루고 책을 샀다. 그나마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ㅋㅋ
나 역시 재테크라 생각하고 오래 애장하고 있을련다.
1896년 민영환의 세계일주 루트
제목 그대로 1896년 민영환 일행이 세계 일주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1896년 4월 2일, 민영환(대사), 윤치호(수원), 김득련(2등 참서관), 김도일(3등 참서관) 등 4명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조선을 떠나 러시아로 향했다.
아메리카와 유럽 대륙을 지나 러시아에 도착한 것이 5월 21일. 이들이 쓴 여행경비는 4만원의 은이다.
본래 계획은 인천 제물포항에서 중국 상하이를 거쳐 홍콩으로, 홍콩에서 러시아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이들이 상하이에 도착해보니, 홍콩가는 프랑스 공사선이 이미 만석이어서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배를 기다리면 대관식에 늦을 지경.
결국 이들은 상하이-일본 나가사키와 요코하마-태평양을 건너 캐나다-미국 뉴욕-대서양을 항해해서 영국 런던-독일 베를린을 거쳐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루트를 이용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세계여행에 나서게 된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은 러시아의 여러 도시를 지난 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이용. 블라디보스톡까지 간 후에 배를 타고 우리나라 원산항에 도착한다. 진짜 지구 한바퀴를 빙 돈 셈이다.
1896년. 조선에서는 고종황제가 다스리고 있었고,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아관파천이 일어난 때이다.
이들이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보낸 것도 새롭게 부상하는 강대국인 러시아의 힘을 이용해 조선을 노리는 세계 여러 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민영환이 쓴 업무일지 일종
이 책은 민영환이 세계 각지를 돌아 러시아에 도착한 후 러시아를 우호세력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언제 누구와 만나 무엇을 했는지를 적은 책으로 일종의 업무일지 비슷하다. 때문에 감정이 크게 들어나 있지는 않지만, 서양에서 겪은 문화 충격이 적지 않았던 듯하다. 이들이 적은 정제된 글과 감정을 읽다 보면 애틋하기도 하다. 그 차림새에 서양 사람들의 눈초리가 얼마나 따가왔을까 싶기도 하다.
반면, 민영환 일행에게 그런 어려움은 그닥 안중에도 없었던 느낌이다.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으로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국가 시스템이 정말 많았던 듯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만한 여유가 없었다고나 할까?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와 산을 뚫어 만든 터널, 강을 가로지르는 길다란 다리. 은행에서의 환전, 사진촬영,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 층을 오르내리는 것, 이것저것 넣어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커피맛과 치즈, 집에서도 물이 졸졸 나오는 상수도 시설 등등 일상생활 속에서 받은 문화충격이 상당해 보였다.
이외에 전화와 국제우편, 전기회사, 학교와 대학교, 종이제조 공장 등 각종 공장, 도서관, 박람회, 소방서, 경찰과 군인 제도 등 선진국의 산업, 교육, 문화, 교통, 국방 등 전반적인 국가 시스템은 부러움 그 자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상투를 틀고 그 위에 갓을 쓰고, 한복을 차려입고 미국 뉴욕 한복판에 서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이런 여정 끝에 이들은 드디어 모스크바에 무사히 도착. 러시아 대관식에 참석하고 우리 국기를 옥상에 걸게 된다. 그리고 황제를 뵙고 요청사항도 말씀드리고 여러 날 있으면서 외교 협상도 벌인다.
1890년대에도 너희들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구나
책을 읽다보니 1896년 서양은 거의 모든 시스템을 다 갖추고 있었던 듯 하다. 1,000개 객실을 보유한 10층짜리 호텔, 국경을 넘는 기차,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는 대형 선박, 전기, 수도, 전화, 우편 등 온갖 기반시설들...
앞서 읽은 에디슨에 관한 책에서 보니, 벨의 전화기가 나온 것이 1876년. 축음기가 나온 것이 1877년, 직류발전기 발명이 1874년, 1840년에는 미국인의 25%가 가스등을 사용, 1878년 에디슨의 전구 발명... 이들이 서양에 가기 약 20년 전에 이미 중요한 여러 발명이 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포드자동차가 나온 것이 1903년. 포드자동차가 나오기 전에 미국 자동차의 1/3은 배터리로 운영되는 전기 자동차...^^ 아마 이들은 미국에서 자동차도 목격했을 것 같다.
이 책은 민영환의 업무일지 비슷해서 서양 문화를 겪은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 책과 함께 윤치호의 책을 덧붙여 읽어볼 것을 권한다. 책 내용 중 수행원 김득련의 글이 있는데, 그나마 감정이 드러나 있다. 김득련이 러시아 궁내부 초청으로 황궁 무도회에 참석해서 쓴 글로서, 필자가 다른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일부를 소개하면,
김득련의 러시아 황궁 무도회 경험담을 보자니..
이상한 색깔이지만 눈 하나는 시원한 서양의 요조숙녀들. 어찌 그리 요란한 옷을 입고 있는가? 내 얼굴이 잘생겨서일까 아니면 남녀칠세부동석을 몰라서일까? 거침없이 군자의 옆자리에 다가와 재잘대누나.
양반네 진짓상에 웬 쇠스랑(포크)과 장도(나이프)는 등장하는가? 입술이 찢기지 않으면서 접시의 물건을 입에 넣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구나.
희고 눈 같은 것(설탕)이 달고 달기에 이번에도 눈 같은 것(소금)을 듬뿍 떠서 찻종지에 넣으니 그 갈색 물(커피)은 너무 짜서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더라. 노르스름한 절편(치즈)는 맛도 향기도 고약하구나.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왠 신사가 목살에 힘줄이 돋을 정도로 소리를 지르니(테너) 모두들 우러러보더라. 서양에서 군자 노릇하기란 원래 저리 힘든가 보다.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소녀가 까치발을 하고 빙빙 돌며 뛰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데(발레) 가녀린 낭자를 학대하다니 서양 남자는 참으로 짐승이구나
정말 코미디가 따로 없지 않은가! 김득련의 글을 좀 더 모아 각색하면 시트콤 한편 뚝딱이겠다. 수십일동안 전 세계를 돌아 러시아에 와서도 남녀칠세부동석을 읇어 대는 조선의 군자가 안쓰럽다. 사람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정말 무섭다는 느낌이 든다.
조선과 서양의 이런 극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부터 우리가 서양인들과 같은 수준의 기술 문명을 누리고 비슷한 사고방식과 문화양식을 공유한다는 것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