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에디슨은
1) 발명왕
2) 대표 발명품은 전구와 축음기,
3) ‘천재는 1% 영감과 99%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그 흔한 명언의 주인공.
4) 중도 학업 포기자인 에디슨이 만일 한국 사람이었더라면.. 하는 상투적 멘트들
아마 이 정도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스타트업 CEO 에디슨>은 우리가 알고 있던 에디슨이라는 사람을 다시 보게 만든다. 물론 발명왕이고, 전 세계인에게 전기를 선사해 준 것 그 자체로도 에디슨은 충분히 영웅이지만, 그런 성과가 나온 것은 단지 에디슨이란 사람이 가진 창의적인 발명 능력만으로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책에서 알게된 에디슨의 사업적 역량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량생산과 연구투자의 원조
전구와 전기 발전 시스템을 발명한 에디슨은 발명에 그치지 않고 직접 회사를 설립하여 뉴욕 전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사업을 하게 된다. 당시 전구도 제작해서 판매했는데, 최초의 전구 제작 비용은 1달러 25센트. 소비자 가격은 40센트. 다음해 제작비용은 70센트. 그래도 판매가가는 40센트. 3년차 제작비용은 50센트. 4년차는 37센트. 4년차에 이르러 수익이 나기 시작. 최종적으로 제작비 22센트 판매가 40센트. 이때부터 그동안의 손실을 만회하고 수백달러를 벌어들임.
전구발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1878년. 전구 공장 가동은 1880년. 전구 공장이 수익을 낸 것은 1884년. 연구부터 생산 그리고 수익까지 6년이 걸린 셈이다. 1880년대 이렇게 긴 안목을 가진 기업가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이 연구투자에 쓰는 돈은 매출액 대비 5~12%. 이러한 풍토를 만들어낸 것은 에디슨의 장기적 안목으로 투자하고 성공한 덕분이었을 것이다.
2. 일종의 메이커 스페이스가 있었던 미국사회
체계적인 특허심사제도를 도입하고 쉽고 저렴하게 특허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미국 사회도 에디슨 같은 발명가에게 유리했다. 놀라운 것은 기계제작소(Machine Shop) 공간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곳은 가난하지만 유능한 발명가들이 큰돈 들이지 않고 자신의 발명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시설과 장비를 지원하는 곳이다.
에디슨은 보스턴의 찰스 월리엄스 주니어의 기계제작소에서 타이프라이터를 만들었다고 한다. 같은 곳에서 벨이 전화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오늘날로 말하지만 스타트업을 위한 메이커 스페이스, 대학 연구실, 창업보육센터 같은 곳이다.
3. 조직에 의한 발명과 연구의 시작. 기업연구소의 창조자 에디슨
에디슨은 어떻게 발명으로 밥벌이를 하게 된 것일까? 현재 스타트업과 비슷하다. 발명계획을 가지고 투자자를 모았다. 발명에 성공하고 특허권을 매각하면 수익을 나누는 조건이었다. 특허를 매각해 종잣돈을 마련하고, 특허로 막대한 발명 자금도 조달했다.
혼자 발명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도제식으로 에디슨의 지휘하여 각 장인의 지휘하에 여러 도제시스템이 돌아가는 방식을 가진 조직이 있었다. 에디슨의 첫 회사는 NTW(Newark Telegraph Works). 독자적으로 세운 첫 회사는 에디슨 앤드 머리(Edison and Murry)였다. 에디슨 앤드 머리도 초반에 직원이 75명이나 되었다니 대단한 조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도제시스템은 그 후 ‘발명 공장’으로 불렸던 멘로파크 연구소(1876~)를 거쳐 연구-주거-제조가 통합된 거대한 복합 산업단지로 발전한다. 에디슨이 뉴저지 웨스트 오렌지에 세운 연구소 기업은 그가 마흔 살이던 1887년에 만들기 시작했는데, 1920년대 전후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던 시절에는 1만 명 이상을 고용했고, 이 연구소 기업은 연구와 주거는 물론 제조까지 겸한 복합 산업단지로 확장되었다.
에디슨이 창안한 ‘조직에 의한 발명과 연구’라는 시스템은 이후 미국에서 뿌리내렸다.
에디슨의 방식을 이어받아 GE가 1900년 기업내 연구소를 만들어 텅스텐 전구와 진공관 연구를 수행했다. 여기서 1932년 노벨 회학상 수상자(어빙 랭무어 Irving Langmuir))가 나오기도 했다.
전화기 제조 전문기업인 웨스턴 일렉트릭(Western Electric)이 1925년 벨 전화연구소를 설립해 세기의 발명인 트랜지스터를 만들어냈다. 화학회사 듀폰은 1988년 소규모 연구팀을 만든 이후 1911년 연구소를 설립했고, 다우 케미칼도 1901년에, 이스트만 코닥이 1912년에 연구소를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미국에서는 375개 기업 연구소가 있었는데, 1931년에 이 수치는 1600개로 상승한다. 미국의 기술발전, 혁신 그리고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만들고 세계 패권국가로 성장하게 한 데에 에디슨이 창안한 연구소 기업도 큰 몫을 했다고 본다.
4. 시장에서 팔리는 것을 발명하다.
정규교육은 고작 3개월 받은 에디슨. 학교를 중도 포기하고 집에서 홈스쿨링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도 그리 길지는 않았다.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그는 12살 때부터 기차 안에서 신문팔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신문팔이 시절 활약이 대단하다. 그는 비즈니스 마인드를 타고났던 것 같다. 처음 에디슨은 포트휴런을 출발해 디트로이트까지 가는 기차안에서 신문을 팔았는데, 포트휴런과 디트로이트의 물가가 다르다는 것을 착안해 기차 안에서 이를 이용한 사업을 시작한다. 포트휴런에 점포를 열고 디트로이트에서 도매가격을 구입한 채소와 버터를 팔아 차익을 남긴 것이다.
운송은 기차 화물칸을 이용하고 필요한 인력도 철도 노동자를 활용했다.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남북전쟁이 나면서 신문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에디슨은 직접 기차안에서 <위클리 헤럴드>라는 제호의 신문을 제작해 팔기도 했다.
본격적인 발명의 길로 나서면서 그는 텔레그래프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게재했다.
“에디슨은 WU를 사직하고 앞으로 발명품의 사업화에 전념하고자 합니다”
‘발명품의 사업화’라는 것은 기업가 선언과 같다. 이 선언에서 엿볼 수 있듯 그의 발명은 비즈니스 친화적이었다.
전화기를 가장 먼저 발명한 것은 벨. 백열전구도 에디슨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에디슨이 중요한 것은 그는 시장에서 팔리는 것을 발명했다는 것이다. 에디슨이 발명한 전화기가 더 선명하게 잘 들렸고, 에디슨의 백열전구가 더 오래, 더 안정적으로 전기불을 밝혔다.
최초에 목숨걸지 않고 사업화하기에 가장 적합한 발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연구소에 가만히 앉아 발명한 것도 아니다. 현장에서. 현장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발명을 했다.
연구소에 실험에 몰두하던 1879년 확보한 특허는 14건. 이후 1880~1882년 발전소 건설, 전기선로 공사 등 현장에 있던 시기에 확보한 특허는 연평균 85건이다. 이런 에디슨의 현장주의 발명. 아마존 CEO 제프 베이조스도 따라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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